<진행자>방울과 부채대신에 카메라를 들고 무속의 현장을 안방처럼 드나들던 한 사람이 있었다.
강냉이, 사진박수, 고지조라 불리던 사람.
가슴아픈 사연에 카메라를 놓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정많은 사람.
고집스럽게도 한국와 아시아의 굿판을 평생 쫓아다니던 사람.
그는 바로 사진작가 김수남이다.
2007년 2월 인사동에서는 평생 굿의 현장을 함께 누리며 희노애락을 같이 하던 사람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 김수남은 없었다.
<자막>인사아트센터 김수남 1주기 추모 굿 2007년
2006년 태국 치앙라이 현장을 기록하다 세상을 등진 김수남에 1주기 추모 굿이 열린 것이다.
전국의 만신들이 자청에서 모두 모여 눈물을 흘려주는 이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세상을 떠난지 10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김수남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인터뷰>고 김수남의 아내 이희영 - 학창시절에 별명이, 이가 좀 듬성듬성 했잖아요 그래서 친구들이 놀려주느라고 강냉이라고 그랬대요.
<인터뷰>고 김수남의 장남 김상훈 - 크게 달랐다거나 굉장히 독특한 아버지였다거나 사실 그런 느낌은 별로 없었어요.
<인터뷰>제주심방 서순실 - 덧니에 덩치도 이만하고 털털한 분이였어요 김수남씨.
<인터뷰>가톨릭관동대학교 교수 황루시 - 일이 굉장히 많은 귀찮은 사람이였는데,
<인터뷰>김수남기념 사업회장 김인회 - 제주도 출신이기 때문에 제주도의 무속에 대해 관심갖고 제주도 무당들하고 금방 친해졌다.
<진행자>1949년 제주도 함덕에서 태어난 김수남은 대학 입학선물로 받은 카메라와의 인연으로 빛과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미학적 신비에 푹 빠져든다.
미신으로 터부시되어온 무속의 현장을 그는 왜 평생동안 기록한것일까.
<인터뷰>고 김수남의 장남 김상훈 - 저도 궁금해서 어릴 적에 많이 물어봤죠.
집에 왜 이렇게 귀신사진 같은 게 많냐 그것도 곳곳에 그때 말씀을 해주셨던 게 이게 아름답게 보이고 멋있어 보이면 아마 그때 너도 커서 어른이 된걸꺼다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인터뷰>자연사랑박물관장 지인 서재철 - 굿 알아주는 것도 아닌 거 뭐하러 애를 쓰면서 하느냐 그랬는데, 그 당시에도 그런 말을 하더라고.
이것은 인류가 꼭 지켜야될 부분 중에 하나고 물론 자연도 그렇지만 조만간 없어질수도 있고 변질될 우려도 있기 때문에 다 남겨야하기 때문에 한다.
<인터뷰>CH14 초대석 출연 당시 - 제 경우에는 원래 사람찍기를 좋아해요.
그런데다가 그 당시에 굿을 하다가 걸리면 유치장 신세를 보고 그랬거든요.
그런분들을 보면서 '아 이거 찍어두지 않으면 당장 소멸되겠다.
특히 인위적으로 이렇게 소멸시키는 것은 기록해두지 않으면 안 되겠다.' 그래 가지고 시작을 했죠.
<진행자>김수남이 찍은 얼굴에는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과 마음이 담긴다고 한다.
하지만 외부인의 접근을 극도로 경계하는 굿판에서 그들의 마음을 열게하고 감정에 맨 얼굴을 어떻게 담을 수 있었을까.
<인터뷰>제주심방 서순실 - 그런데 특징이 있어요 그분이. 제주도 말을 잘하고 그냥 상대방이 화를 내도 하하하 웃으면 상대방도 오지 못하게 못하거든요.
<인터뷰>자연사랑박물관장 지인 서재철 - 사진을 찍으려면 그 사람들하고 친해져야 될 거 아니에요.
친해지려면 같이 술도 먹고 거기서 같이 자고 그 특이한 친화력이 있어요.
사람 뭐 하는데 이렇게 보면은.
<인터뷰>가톨릭관동대학교 교수 황루시 - 무당들고 그렇고 다들 겁을 좀 먹었댔어요.
이거 뭐하러 왔나 저는 사실 여자기 때문에 별로 그러한 것은 자유로웠어요.
남자들은 경계를 많이 당한거죠.
사실 김인회 선생님은 굿판에서 굉장히 많이 쫓겨났어요.
특히 안경 쓴 사람들을 무서워하거든요 무당들이.
그런데, 김수남씨는 그런 것을 쉽게 경계를 푸는 편이었지만 그래도 70년대는 만만치 않았는데..
<진행자>사진사는 시간과 역사의 순간을 포착해 영원히 남겨야하는 직업이다.
그런면에서 보자면 김수남은 매우 순간적이고 역동적인 굿의 핵심을 명확하고도 그리고 생명력 있게 담아내는 작가였다.
<인터뷰>사진작가 제자 백지순 - 카메라를 네 대를 목에 걸고 계셨어요.
이 네 대의 카메라로 이렇게 찍었다 저렇게 찍었다 해서 거의 놓치는 게 없을 정도로 한번에 당신 혼자서 다 하시는 거에요.
<인터뷰>자연사랑박물관장 지인 서재철 - 촬영 나가기 전에 이야기 하는 것을 보면 그러더라구요.
전체적으로 전부 숙지를 해서 굿을 어떻게 진행하고 어떤 것은 어디 가서 뭐되고 전부하면은 전날 가서 그런영상을 다 다니면서 보더라고..
<인터뷰>김수남기념 사업회장 김인회 - 이 친구가 사진 찍는다니깐 내가 그 친구 옆에서 같이 찍으면서 앵글을 흉내내면은 나도 좀 좋은 사진 좀 찍을까 하고 이 사진이 그 좁은 집에서 같이 어깨 부딪히면서 찍었는데 완전히 이건 뭐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라는게 확 눈에 띄게 기가 막혀가지고.. '야 나 이제 사진 못 찍겠다.
김수남이 네가 다 해먹어라 나는 이제 그만한다.'
<진행자>1973년부터 김수남은 본격적으로 한국의 굿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한다.
하지만 작업이 진행될수록 굿에 대한 온전한 예외없이 그저 보이는대로만 찍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회의를 느껴 한동안은 카메라를 잡지 않았다.
<인터뷰>CH14 초대석 출연 당시 - 처음에 한 3년정도는 이제 그 어떤 사명감이 사라질 것이니까 내가 기록해두지 않으면 안된다.
이시대의 사진가로써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랬는데, 한 삼년지나니까 그게 벽에 부딪치더라구요.
그래서 공부를 굿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고 그 당시에 나와있는 책이나 논문 같은 것을 구해서 읽고 그러면서 이제 굿 공부도 하고 그랬습니다.
<인터뷰>제주전통문화연구소 실장 제자 문봉순 - 선생님은 사진을 찍으시지만 정말 자료조사를 철저하게 하시는 분이세요.
그래서 국내에 있는 자료는 기본이고 외국에 나와있는 논문까지 입수해서 반드시 읽어보고 현장 가시거든요.
<진행자>이처럼 사진가로써의 능숙한 기량은 물론 철저한 사전지식의 습득은 그가 무속사진분야에서 독보적인 업적을 쌓을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사진가 김수남은 민속 한 분야에 오롯이 각인시킨 하나의 업적이 있다.
바로 10여년동안 전국의 굿을 촬영하고 정리하여 만든 한국의 굿 시리즈이다.
<인터뷰>김수남기념 사업회장 김인회 - 80년대 초반까지도 우리나라 무속의 전체적인 그림에 대해서 학자들 간의 통일된 어떤 의견이랄까 교과서적인 그림이 없었어요.
<인터뷰>제주전통문화연구소 실장 제자 문봉순 - 제가 한국의 굿 공부하면서 바이블과 같이 생각 했던 게 선생님의 사진집이었어요.
사진만으로도 충분히 포인트를 잘 보여 주시는 분.
인간적인 부분들과 내용적인 부분들을 그런 부분들에서 선생님의 사진들을 또 다른 저의 교제로 생각하고 공부를 했습니다.
<인터뷰>열화당 대표 이기웅 - 스무권의 개성있는 지역을 대변하는 굿의 모습들을 담아내는 일들은 아무리 작은 볼륨이지만 한권의 책은 한권의 책이거든요.
그래서 그것을 스무 권을 낸다고 하는 인내력은 김수남 못지않게 나도 중요했고 나 못지않게 김수남도 대단한 인내력을 가지고 굿의 기록을 했던 것은 제게 지금도 큰 추억입니다.
<진행자>1983년부터 1993년까지 전 20권에 걸쳐 펴낸 방대한 사진집.
한국의 굿은 김수남의 굿사진을 집대성하는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그의 사진은 단순히 자료적 가치를 뛰어넘어 예술적으로 사진 인류학적으로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작업이었다.
<진행자>1985년 그는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던졌다.
한국의 굿에만 머물던 시선을 아시아로 돌린것이다.
<인터뷰>김수남기념 사업회장 김인회 - 80년대가 끝나 갈 때 쯤 되니까 거의 전국을 커버하게 되어가니까 김수남이가 자꾸 외국 쪽으로 관심을 갖더라고.
<진행자>사진가로써는 남은 일생을 내걸 중대한 결심이었지만 가장으로써는 쉽지않은 결정이었다.
<인터뷰>고 김수남의 아내 이희영 - 그 사람이 자기 하는일에 대해서 어떤 책임감을 가지고 잘 할것이라고 하는 신뢰가 있었어요.
그래서 밀어주겠다고 그랬어요.
<인터뷰>김수남기념 사업회장 김인회 - 80년대 중반인가 동아일보기자까지 다 집어치우고 프리랜서로 돌았어요.
참 그게 쉽지 않은 결정인데 아시아쪽 무속, 오지를 찾아다니고 그랬을거야..
<인터뷰>가톨릭관동대학교 교수 황루시 - 김수남씨가 아시아의 민속과 굿이나 그 다음에 일상 사람들의 삶이라든가 또는 생업이라든가 이런 것을 소개하면서 그 후에 학자들이 공부도 하게 되고 또 방송국에서 다큐멘터리 같은 것을 찍으러 거기가고 이런 것들을 하면서 우리가 조금씩 아시아에 대해서 알게 되었는데, 저는 그 부분이 김수남씨가 우리 사회에 끼친 굉장히 큰 영향이라고 생각해요.
<인터뷰>자연사랑박물관장 지인 서재철 - 우리나라 굿을 할 때에는 대부분 흑백인데, 동남아쪽을 나가면서 컬러로 하니까 느낌이 다르더라.
<인터뷰>김수남기념 사업회장 김인회 - 3년동안 일본의 무속을 조사하고 촬영했는데, 그렇게 필드웍을 하면서 아마 김수남이 일본에 그치지 않고 동남아까지 확장할 생각을 한 것 같아요.
<진행자>세상은 너무나 빨리 변하고 산업화 되어갔다.
어쩌면 김수남은 급속히 변해가는 세상만큼이나 더 급했을지 모른다.
변하기전에 조금이라도 더 인간의 원초적 삶을 담으리라는 마음에서 말이다.
<인터뷰>김수남기념 사업회장 김인회 - 아시아를 뒤지고 다녔는데, 김수남이 찍은 아시아 태국이나 베트남 이런데도 이제 그 현장이 벌써 없어졌어.
<자막>고 김수남 육성
정말로
자유롭고
편안하고
아름답게 살아갑니다.
그들은 밤이 되면
음악을 즐기고
춤을 즐기고
그러다가 축제가 되면
야외에서
신나게 한판 놉니다.
이미
많이 사라져가고 있는
그들의 문화.
정말
안타까운
모습들입니다.
서양문화
특히
식민지일을 처음 했던
그들의 스페인문화
미국문화를 겪으면서
전통적인 아름다움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사회자>김수남이 찍은 화려한 색채와는 달리 누구도 알려주지 않는 개척의 길은 외롭고 고된 자기만의 싸움이였을 것이다.
<인터뷰>사진작가 제자 백지순 - 지금까지의 사진들 정리하셔도 한참 걸리실텐데 뭐 그렇게 오지를 또 가시느냐고 그랬어요.
선생님께서는 에너지를 다해서 죽는 그날까지 사진을 찍으시리라 이런 마인드를 갖고 계셨던 거 같아요.
<인터뷰>김수남기념 사업회장 김인회 - 시베리아에 가서 그 쪽 무속촬영을 하다가 쓰러져서 공수돼서 왔어요.
그러면 자기가 정신 차리고 몸을 추스르고 그랬어야되는데...
<인터뷰>자연사랑박물관장 지인 서재철 - 굿하는 시절이 얼마나 춥습니까.
그냥 그 불하나 안때는데 거기가서 그냥 쪼그려 앉고 김수남의 모습을 보면요 얼마나 추웠을까요.
우리는 추우면 그냥 밖에 나가서 뭐라도 하는데 그 친구는 꾸준히 계속 앉아서 하니까 그런 걸 이기려고 하면 술을 안 먹을 수가 없겠죠.
<인터뷰>가톨릭관동대학교 교수 황루시 - 항상 이야기했죠.
원래 다큐멘터리 작가는 현장에서 죽어야한다.
그런데 김수남씨가 외로움을 또 많이 타는 사람이기도 해요.
그러니까 한국에 있을때는 술친구들이 많죠.
일하면서 술먹고 할수 있었고 외국 가서는 술이 유일한 친구였었던 것 같아요.
고독이 계속 많이 쌓이면 사람이 좀 황폐해질 수 있는 거거든요.
힘들어서 나중에는 그게 큰 병이 될 수 밖에 없었거든요.
<진행자>샤머니즘이라는 가슴 깊숙한곳의 풍경을 담아내려는 기록은 그가 숨을 거두기 전까지 계속 되었다.
<인터뷰>제주전통문화연구소 실장 제자 문봉순 - 고산지대다보니 그런 차이들이 많았거든요.
저희가 치앙라이 시내에서도 트럭을 빌려서 한시간 넘게 고산족이 사는 마을로 들어가서 조사를 했었어요.
그리고 끝나고 쉬시고 계시다가 갑자기 저녁에 선생님이 안 일어나셔서 제가 방을 찾아갔더니 뇌출혈처럼 그런 현상이 일어났던 거죠.
<인터뷰>고 김수남의 장남 김상훈 - 당신 아버지가 지금 코마에 빠져있다.
그 다음부터 거의 30분 1시간 간격으로 전화가 계속 오는 거에요.
상태가 더 안 좋아진다.
뭐가 안 좋아진다.
그날 오후에 어떻게 간신히 표를 구해서 공항으로 떠났고 동생은 누군가 한명은 여기 남아서 무언가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할 거 아니냐. 상황이 이렇다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공항에 갔을 때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진행자>2006년 2월4일 태국 치앙라이에서 들려온 갑작스러운 그의 부고.
다큐멘터리 사진 작가는 현장에서 촬영하다 최후를 맞는일이 가장 행복할것이라던 평소 말대로 그는 카메라를 잡고 세상을 떠났다.
평생 한국의 굿과 아시아의 무속현장을 묵묵히 기록하며 남긴 김수남의 17만여장의 사진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긴것일까.
<인터뷰>제주전통문화연구소장 박경훈 - 더 없이 귀중한 사진들이 되어 버린게 세상은 너무 빨리 변하고 김수남 사진에 있던 장면들은 이제 더이상 만나기 힘들죠.
그런 측면에서 어쨌든 한시대만 기록한 게 아니구요.
한 문화사를 기록한 기록자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인터뷰>제주심방 서순실 - 사진 찍을 때는 아주 열성적으로 끝나면 털털털한 웃음 그냥 술한잔 먹으면서 형제처럼 친구처럼 그렇게 했던 분. 다시 이런 인재가 나올까. 안 나와.
<인터뷰>가톨릭관동대학교 교수 황루시 -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면 아시아에 속해 있으면서도 아시아를 몰랐다라는 생각이 드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가 생각할 때는 우리의 머릿속에는 일본과 중국만이 관심 대상이지 그 외에 나라라는 게 없었는데, 김수남씨가 그걸 넓혀놨죠.
<인터뷰>김수남기념 사업회장 김인회 - 사진작가이면서 문화연구의 통찰력 감각 이런것을 가지고 살았던 선구자적인 게 있지.
우리나라에 뛰어난 사진작가들이 많지만 그런 총체적인 문화를 보고 변화를 읽는 것은 쉽지 않아. 김수남은 그게 있어.
<자막>인사아트센터 김수남 1주기 추모 굿 2007년
<진행자>김수남이 세상 떠난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그를 보내지 못하고 있다.
<인터뷰>고 김수남의 아내 이희영 - 좀 같이 그저 그냥 아옹다옹 하면서 같이 오래 살았으면 자기도 하고 싶은일 더 많이 하고 저는 저대로 그저 남편한테 바가지도 좀 많이 긁어가면서 편안하게 살 수 있었는데, 왜 이렇게 빨리 갔나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죠.
<인터뷰>김수남기념 사업회장 김인회 김수남이 살아있었다면 아시아를 넘어서 인류의 시원인 아프리카쪽까지도 틀림없이 관심 갖고 쳐들어갔을거야.
<인터뷰>가톨릭관동대학교 교수 황루시 - 이제 현장은 점점 사라지는데, 그 변화를 지켜보는 사람이 없다는거 김수남씨 이후로 그런 후배들이 별로 안 나왔다는게 좀 안타깝죠.
<인터뷰>제주심방 서순실 - 신방이 죽으면 심사왕에 가거든. 김수남씨도 삼시왕에 간 거 같아요. 삼시왕에서도 사진 찍으면서 거기도 그 나름대로 사진 절차를 하고 마지막으로 오만근이를 만나서 술을 먹으면서 회포하고 있을 겁니다.
<진행자>방울과 부채대신 카메라를 든 사진박수 김수남.
그의 사진은 사라진 시간에 대한 기록이 아니다.
들여다보면 볼수록 생생해지는 끝없는 기억인것이다.
<자막>굿이란 무엇인가.
나는 여기서 무엇을 표현하고.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가.
아마 삶과 죽음, 고통과 환희, 좌절과 희망,
이런 것들을 가장 극렬하고 감동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굿판일 게다.
어차피 사회와 시대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는,
그래서 보호 받아야 할 대상으로 까지 변해 버린
나의 신앙체계.
이것을 찍으며 하나의 증언,
하나의 기록이 될 수 있기를 꿈꾸었다.
(1983년 '한국의 굿' 발간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