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 전시영상 2020 상설전시3 온라인 전시해설 한국인의 일생-과거제도,환갑-

2020-09-24 조회수 : 3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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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설전시3 전시해설 한국인의 일생-과거제도,환갑-
이 전시관에서는 조선시대(1392~1910) 양반 사대부 집안의 개인이 태어나 죽을 때까지 겪게 되는 주요한 과정을 전시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 이념에 따라 아들 중심의 가계(家系) 계승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서, 출산 전부터 남자아이를 기원하였다. 출산 후에는 백일잔치나 돌잔치를 열어 아이가 무사히 성장한 것을 축하하였다. 남자는 20세에 관례(冠禮)를, 여자는 15세에 계례(笄禮)를 치러 어른으로 인정받고, 혼례(婚禮)를 치러 가족을 구성하였다. 남자는 과거를 봐서 관직에 나가고, 여자는 안주인으로 집안 살림을 관장하는 것을 중요한 의무로 여겼다. 죽음에 따른 가족의 슬픔은 삼년상(三年喪)이라는 상례(喪禮)를 치르면서 극복하고, 돌아가신 조상은 사당에 모시고 제사(祭祀)를 지냄으로써 자손의 번창과 친족의 화합을 도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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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설전시관3 한국인의 일생
출세, 풍류, 회갑, 치유

앞서 조선시대의 성인식인 관례부터 풍산김씨 허백당 문중의 가족 이야기까지 살펴보았습니다. 지금부터는 조선시대의 과거제도부터 환갑까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조선시대는 엄격한 신분사회였지만, 과거시험을 통해서 신분상승이 부분적으로 가능했습니다. 학문을 중시하는 유교사회에서는 무관보다 문관을 우대 했는데요. 문과에 급제해서 문관이 되는 것은 개인의 사회적 성공이자 가문의 영광이었습니다. 과거시험에서 문과 중 대과에 합격한 사람에게는 이름과 급제자 성적, 등급이 적힌 최종합격 문서인‘홍패’를 내리는데요. 술과 안주를 하사하며‘어사화’도 함께 내렸습니다. 어사화는 왕이 내리는 종이꽃으로 복두(幞頭)뒤에 꽂아 3일 동안 유가를 하였다고 합니다.

등용문

‘등용문(登龍門)’은 큰 물고기가 물살이 세고 거친 중국의 용문에 뛰어올라 용이 되었다는 고사에서 유래 되어 입신출세(立身出世)의 관문을 상징합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과거시험이 곧 출셋길이었기 때문에 잉어를 새긴 벼루나 잉어그림인‘약리도(躍鯉圖)’․‘연리도(蓮鯉圖)’를 공부방에 걸어두고 과거 급제를 꿈꾸었습니다.

남여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시대는 의복과 탈 것 등에도 제한이 있었는데요. 이 가마는‘남여(藍輿)’라고 부르며 조선시대 고위관리가 탈 수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에 가마를 타고 대궐 문안까지 들어갈 수 있었던 사람은 삼정승(三政丞) 정도였습니다. 이 남여는 3품의 승지(承旨)와 각조의 참의(參議) 이상의 관원이 탔습니다.‘죽여’나‘죽교’라고도 불렀고, 위쪽은 의자와 비슷하고 앞쪽 양쪽에 긴 나무로 된 두 개의 채를 꿰어 붙이는데, 포장이나 덮개가 없습니다. 앞뒤에서 두 사람이 어깨에 메서 이동했는데 손으로 들기도 했고, 주로 산길 등의 좁은 길을 갈 때 이용 하였습니다.

무관

무관(武官)은 병서와 활쏘기 등의 무예 기술을 시험하는 무과시험 출신의 관리를 말합니다. 무관은 정3품인 절충장군까지만 올라갈 수 있어서, 우두머리는 모두 문관이 겸직하였습니다. 무관직은 비록 문관직에 비해 차별을 받기는 했지만, 임진왜란 이후 매년 실시되는 무과 시험과 완화된 응시자격 등으로 하층민에게 신분상승의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 초상화의 주인공은 1800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역임했던 민광승(閔光升, 생몰연대 미상)입니다. 조선시대 문관과 무관은 관복의 가슴과 등에 붙이는‘흉배(胸背)’에 차이를 두어서 지위를 나타냈는데요. 3품이하의 당하관(堂下官)은 단호(單虎)흉배, 3품 이상 당상관(堂上官)은 쌍호(双虎)흉배를 다는데, 문무 관리들의 흉배 제도는 1505년(연산군 11)에 1품에서 9품까지 모두 흉배를 달기 시작하여 1910년까지 시행하였습니다.

문관

문관(文官)은 유학 경전에 대한 지식과 논술을 시험하는 문과 시험 출신의 관리를 말합니다. 조선시대에는 학문과 유학을 숭상하여 무관보다는 문관을 우대하였습니다. 문관은 최고 정1품 영의정까지 올라 조정의 인사권 뿐만 아니라, 군사지휘권까지도 장악 하였습니다. 그래서 문과시험을 거쳐 문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최고의 출세이자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문관흉배는 3품 이상은 두 마리 학이, 3품 이하는 한 마리 학이 수놓아져 있습니다. 여기 보이는‘단령(團領)’은 문관이 평상 집무시에 입은 관복으로 목 부분의 깃이 둥근 것이 특징이며, 일반적으로 아래 보이는 관복함에 넣어서 보관하였습니다.

패옥과 후수

패옥(佩玉)과 후수(後綬)는 왕․왕비의 법복(法服)이나, 관리들의 조복과 제복을 입을 때 양 옆과 뒤에 차는 장식물입니다. 패옥은 양 옆에 늘어뜨렸는데, 모양이 다른 여러 개의 옥[(형(珩)․거(琚)․우(瑀)․황(璜)․충아(衝牙)]을 푸른 비단주머니 속에 넣어서 찼습니다. 관리용 후수는 관직의 등급에 따라 자수무늬와 둥근 장식이 달랐는데요. 1․2품은 운학문(雲鶴紋)에 금환(金環)을, 3품은 반학문(盤鶴紋)에 은환(銀環)을, 4품은 연작문(練鵲紋)에 은환(銀環)을, 5․6품은 연작문(練鵲紋)에 동환(銅環)을, 그 이하는 계칙문(鸂鶒紋)에 동환(銅環)을 달았습니다. 후수는 백색 비단끈인 대대(大帶)에 달아서 허리에 매었습니다.

만인산

만인산은 고을 사람들이 지방 관리의 공덕을 기리며 감사의 표시로 바친 일산(日傘)을 말합니다. 전 고을 사람들의 이름을 새겼다고 하여 ‘천인산(千人傘)’혹은‘만인산(萬人傘)’이라고도 하며 비단에 이름을 자수로 놓았다 해서‘수산(繡傘)’이라고도 합니다. 일산은 원래 수령이나 감사가 외직으로 나갈 때 햇볕을 가리는 의장(儀仗)의 하나였으나, 조선 후기에는 송덕비와 함께 수령의 공덕을 기리는 기념품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 만인산은 1887년 평안북도 희천군 고을 사람들이 희천 군수 김영철의 공덕을 기리며 바친 것입니다.

풍류

조선시대 양반들은 일상생활을 벗어나 자연 속에서 휴식하면서 풍류(風流)를 즐겼습니다. 깊은 산속 초당(草堂)에서 홀로 거문고를 어루만지며 시를 읊거나 친척, 친구들과 경치 좋은 곳에서 노래와 춤으로 친목을 다졌습니다. 판소리나 거문고 같은 악기 연주를 감상하면서 술을 마시거나, 시를 주고 받고 그림도 감상하면서 사대부로서의 소양을 길렀습니다. 또한 바둑, 장기, 투호 등으로 여가를 즐기며, 산과 들에서 활쏘기를 하면서 심신을 단련하였습니다.

풍류-놀이

조선시대 양반들이 즐겨 놀았던 놀이 도구들이 있는데요. 쌍륙(雙六)은 두 사람 또는 두 편으로 갈라서 차례로 주사위를 던져서 말을 이동하여 적진에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이기는 놀이입니다. 주사위를 던져서 나오는 눈이 6.6이면 반드시 이긴다고 해서‘쌍륙(雙六)’이라고 부르는데요, 말은 1에서 6까지 새겨진 주사위 2개를 굴려서 나온 숫자에 따라 이동합니다. 이 놀이는 서역(西域)에서 유입되어 주로 궁중이나 양반가에서 행해졌다가 조선시대에는 널리 보급되어 정초나 명절날 즐겨 놀았습니다. 장기나 윷놀이가 일반서민들도 즐겼던 대중적인 놀이였다면, 바둑이나 쌍륙 ․ 투호 ․ 승경도(陞卿圖)는 상류층 중심으로 즐기던 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풍류-활쏘기

활쏘기는 일정한 거리에 과녁을 세워 놓고 활을 쏘아 맞히는 우리 민족의 오랜 전통 놀이였습니다. 예부터 활쏘기는‘사예(射藝)’라고 하여 사대부가 반드시 익혀야 할 무예의 하나로 인식되어서, 단지 심신을 단련할 뿐만 아니라 사대부의 덕행을 수양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일상에서 벗어나 활쏘기로 사냥을 즐겼고, 마을마다‘향사례(鄕射禮)’라는 활쏘기 의식을 치르면서 사대부 간의 친목을 도모하였습니다.

풍류-서화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학문적 수양으로 관직에 나가는 것을 출세로 여길 뿐만 아니라 시(詩)․서(書)․화(畵) 모두에 능한 것을 최고의 재주로 여겼습니다. 시나 글을 쓰는 것은 관직 생활에 필요한 기초 지식이었지만, 자기의 감정을 글이나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도 사대부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었습니다. 그래서 종종 일상생활을 벗어나 경치 좋은 곳에서 서로 글을 주고받거나 그림을 감상하면서 서로의 기량을 겨루었으며, 이러한 모임을 기념하여 글과 그림으로 표현한 계회도(契會圖)로 남기기도 했습니다.

풍류-악기

풍류 전시장의 중앙에 악기들이 전시되어 있는데요. 악기 앞에 있는 음성기를 통하여 악기의 연주를 직접 들어보실 수 있습니다. 거문고는 6줄의 현악기로 소리가 깊고 장중하여 예로부터‘백악지장’이라고 하였고, 학문과 덕을 쌓은 사대부들 사이에서 널리 사랑을 받았습니다. 가야금은 12줄의 현악기로 소리가 맑고 우아해서 아악과 민속악에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대금은 가로로 부는 관악기로 청아한 음색과 독특한‘청(淸)’소리로 인해 독주 음악으로 많이 연주되었습니다. 장구는 긴 통 양쪽에 복판을 붙여 채와 손 등을 이용해서 치는 타악기입니다. 향피리는 세로로 부는 관악기로 음량이 커서 대풍류에 주로 사용합니다. 단소는 퉁소보다 작은 악기로 세로로 부는 관악기이고, 아쟁은 7줄의 현악기인데 길고 낮은 저음으로 합주 음악에 사용되었습니다. 해금은 2현의 현악기로 현과 현 사이를 문질러 소리 내는 앙앙거리는 독특한 음색으로 인해‘깡깡이’라고도 부릅니다.

치유

조선시대에는 병이 들거나 몸이 허약해지면 한약방에서 치료를 하였습니다. 한약방에서는 주로 중국의 의학서를 참고하였지만, 허준(許浚)의 『동의보감(東醫寶鑑)』이 보급되면서 병의 증상에 따라 침을 놓거나 뜸을 뜨고, 약재를 조제하여 병을 치료하였습니다. 그러나 한방으로도 낫지 않을 때에는 굿이나 부적(符籍)과 같은 주술(呪術)등의 초자연적인 힘에 의지하여 병을 예방하거나 치료하고자 하였습니다.

침구

한방에서는 인체에 5장 6부(五臟六腑)가 있어서 기능이 서로 조화되면 건강하지만, 조화가 깨지면 병의 증상이 나타난다고 여겼습니다. 이에 해당 경락의 경혈을 골라서 막힌 기(氣)와 혈(穴)을 풀어주면 장부의 기능도 조화를 이루게 된다고 하여 혈점에 침을 놓아 치료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주요 반응점 365경혈 및 이 반응점을 연결한 경로인 14경락을 표시한 인체도[經絡圖, 經穴圖]와 사람 형상인 동인(銅人)을 만들어서 침술을 익혔습니다. 한약방에서 쓰는 약재와 도구들을 볼 수 있는데요. 약을 조제하기 위해 필요한 약재 이름과 분량을 적은 약방문이 있고, 약재 무게를 재는 약저울, 약재를 빻거나 갈 때 쓰는 약연(藥碾), 약재를 자르는 약작두, 한약재를 달일 때 사용하는 약탕기, 이외에도 약틀, 약사발도 볼 수 있습니다. 박물관에 오시면 한약 재료가 들어 있는 서랍을 열어서 실제 약재들을 보면서 약재향을 맡아 보실 수도 있습니다.

한약방

한약방은 의원이 약물과 침구술(鍼灸術)로 환자를 치료하는 의원(醫院) 겸 약방을 말합니다. 조선시대에는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과 『동의보감(東醫寶鑑)』이 편찬되어 민간에 보급되고, 침구술의 발달과 함께 사람의 체질을 네 가지로 분류한 사상(四象)체질 의학이라는 새로운 의학이 나와 우리의 독자적인 의학기술로 한약방을 운영하기도 하였습니다. 한약방에서는 의원이 환자를 진맥하고 있고, 옆방에서는 약재를 약작두로 손질하고 있는 모습을 재현해 놓았는데요. 병이 들거나 허약해지면 한약방에서는 이렇게 맥을 짚어서 약을 처방하고 침을 놓거나 뜸을 떠서 병을 고쳤습니다. 『동의보감』은 현재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굿청

특별한 치료법이 개발되지 않았던 조선시대는 천연두와 홍역이 가장 무서운 질병이었습니다. 이를 예방하거나 다스리기 위해 무당을 불러서 별상굿이나 호구굿을 하고 마을에서는 마마배송굿을 하였습니다. 여기에 재현한 굿청은 홍역을 다스리기 위한 호구굿을 하는 장면입니다. 이러한 무속신앙은 개인과 가정, 마을 공동체의 어려움을 해소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때론 인간의 삶 속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나 질병을 막아주기도 합니다. 굿은 무당이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노래와 춤으로써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해 달라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서는 무당이 굿을 할 때나 점을 칠 때 사용하는 무구들을 볼 수 있는데요. 혼령을 불러 모실 때나 무당이 춤출 때, 그리고 신령이 오셨을 때 주로 사용하는 성수부채와 방울이 있고, 동서남북 중앙의 방위를 지키는 신을 상징하는 오방신장기(五方神將旗)가 있습니다. 오방신장기의 오색은 우환(憂患), 명복(命福), 재수(財數), 죽음(死) 그리고 조상(祖上) 등의 운명으로 상징되고 있습니다.

주술과 점복

한방으로도 낫지 않을 때는 굿이나 부적과 같은 주술로 병을 예방하거나 치료하기도 하였는데요. 인간이 초자연적인 힘을 빌어서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고자 할 때 행하는 원초적인 방법이 주술(呪術)입니다. 주술은 세시풍속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주로 병을 예방하거나 치료하기 위해 무당의 능력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또한 귀신이나 재앙을 쫒고 복(福)을 부르기 위해 부적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앞일을 미리 알고 싶어서 점통의 내용으로 점을 치는 작괘점(作卦占)이나 사람의 얼굴과 손금을 보아 그 사람의 일생을 판단하는 관상점(觀相占)등을 보았습니다. 왼쪽에 전시된 매 그림 부적에서 매는 하늘 세계를 오가는 영험한 새로 병이나 액운을 가져가라는 의미로 그려 넣습니다. 아래쪽의 당사주(唐四柱)는 사람이 태어난 해와 월․일․시를 의미하는 사주를 토대로 한 사람의 평생 운세를 주역(周易)에 맞추어 풀이한 책입니다. 제웅은 짚으로 만든 사람의 형상인데요. 추령(芻靈) 또는 처용(處容)이라고도 합니다. 나이에 따라 운수를 맡아보는 아홉 직성 중 나후직성(羅睺直星)또는 제웅직성(直星)이라고 하는데 9년마다 한번씩 온다고 합니다. 제웅직성이 든 사람은 음력 정월 14일에 제웅을 만들어 옷을 입히고, 그 머리에 이름과 출생한 연도의 간지를 적은 종이와 돈을 넣어서 길가에 버립니다. 그러면 그 해의 액을 막을 수 있다고 합니다.

회갑

현재는 60세에 환갑잔치를 하는 일이 거의 없지만,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만 60세 생일이 되면 회갑(回甲) 또는 환갑(還甲)이라 하여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당시 60세 이상은 장수(長壽)를 의미하므로, 자손들은 이를 영광스럽게 여겨 친척과 친구들을 초대하여 생일을 기념하였습니다. 잔칫날에는‘백수백복도(百壽百福圖)’병풍을 쳤는데 백수백복도는 백개의 수(壽)자와 수많은 복(福)자를 반복해서 그려넣은 병풍으로 부모님이 그만큼 장수하고 복을 많이 가지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회갑상을 차려 집안 어른의 장수를 축하하고, 술을 올리고 절을 올리며 만수무강(萬壽無疆)을 기원하였습니다. 회갑상은 다른 잔칫상과 달리 효심을 나타내고자 밤, 대추 등의 과일을 높이 쌓아올리고,‘기쁠 희(囍)’․‘목숨 수(壽)’등 기원하는 글자를 장식하였습니다. 회갑상은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잔치이므로 남자는 동쪽에, 여자는 서쪽에 앉습니다. 회갑상 앞에는 술과 잔이 놓인‘헌주상(獻酒床)’을 따로 놓고, 자손과 친척들이 나이순으로 잔을 올리고, 부모님께 큰절로 건강과 장수를 기원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조선시대의 과거제도부터 환갑까지의 모습을 살펴보셨습니다. 다음은 조선시대 양반사대부들의 죽음부터 그 이후의 모습까지 즉, 상례와 제례에 관하여 살펴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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