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 전시영상 2020 상설전시3 온라인 전시해설 한국인의 일생-상례,제례-

2020-09-24 조회수 :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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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설전시3 전시해설 한국인의 일생-상례,제례-
이 전시관에서는 조선시대(1392~1910) 양반 사대부 집안의 개인이 태어나 죽을 때까지 겪게 되는 주요한 과정을 전시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 이념에 따라 아들 중심의 가계(家系) 계승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서, 출산 전부터 남자아이를 기원하였다. 출산 후에는 백일잔치나 돌잔치를 열어 아이가 무사히 성장한 것을 축하하였다. 남자는 20세에 관례(冠禮)를, 여자는 15세에 계례(笄禮)를 치러 어른으로 인정받고, 혼례(婚禮)를 치러 가족을 구성하였다. 남자는 과거를 봐서 관직에 나가고, 여자는 안주인으로 집안 살림을 관장하는 것을 중요한 의무로 여겼다. 죽음에 따른 가족의 슬픔은 삼년상(三年喪)이라는 상례(喪禮)를 치르면서 극복하고, 돌아가신 조상은 사당에 모시고 제사(祭祀)를 지냄으로써 자손의 번창과 친족의 화합을 도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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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설전시관3 한국인의 일생
상례, 제례, 기증자의 벽

앞서 조선시대의 과거제도부터 환갑까지 살펴보았습니다. 지금부터는 조선시대 사람들의 죽음부터 그 이후의 모습까지 즉, 상례와 제례에 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상례

상례는 죽은 사람을 땅에 묻고 27개월 만에 탈상(脫喪)하는 3년 동안의 의례를 말합니다. 조선시대는 ‘효(孝)’라는 유교적인 윤리에 따라 삼년상을 자식의 도리로 여겼습니다. 자식들은 돌아가신 이의 마지막 길을 화려한 상여에 태워 보내고, 내세를 위한 생활 용기인 명기들도 함께 묻었습니다. 그리고 삼년상 동안 자식은 벼슬이나 농사일도 그만두고 집 안에 상청(喪廳)을 차리거나 산소 곁에 여막(廬幕)을 짓고 돌아가신 이가 살아계신 듯이 아침·저녁으로 공양하였습니다.

상여(喪輿), 만장(輓章)

화려한 나무인형으로 장식된 상여가 보이시죠? 이 상여는 전주 최씨 고령 댁에서 사용한 것으로, 진주화단 친목회에서 기증해 주신 것입니다. 현재는 국가민속문화재 제230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상여는 상례 때 관을 묘지까지 운반하는 기구로 원래는 소나 말, 또는 사람이 끄는 수레[柳車]였으나,『주자가례(朱子家禮)』를 수용하면서 사람이 어깨에 메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상여 형태는 가마와 비슷하나, 몸체 좌우에는 멜채[長杠]가 있어서 형편에 따라 12명 또는 24명까지 멜 수 있습니다. 상여는 대개 마을마다 공동으로 준비해두어서 필요할 때마다 빌려서 사용하였으며, 상여틀을 분해․조립할 수 있도록 만들며, 동네에서 조금 외진 곳에 있는 상여집에 보관하였습니다. 이 상여는 4층 누각 형태를 하고 있고, 각 층마다 나무인형과 십이지신상이 장식되어 있습니다. 전시장 위쪽을 보시면,‘상여행렬’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상여행렬 앞쪽으로는 만장 행렬이 앞서게 되는데요. 만장은 고인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며 지은 글을 비단이나 종이에 적어 깃발처럼 만든 것입니다. 대개 살아생전에 고인과 친분이 있었던 사람들이 써서 바치는 것이기 때문에‘만장행렬’의 규모는 곧 고인의 사회적 명성을 알려주는 척도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수의(壽衣)

수의는 상례 절차 가운데 시신을 목욕시키는 습(襲)을 하고 난 후 입히는 옷입니다. 보통 겉옷은 생전에 입던 혼례복이나 회갑 예복 등 큰 예복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고, 속에 입는 옷은 대부분 새 옷을 마련하여 입힙니다. 수의를 제작할 때에는 생전의 옷 크기보다 조금 크게 하였고, 속에 입는 옷은 염색하지 않은 소색(素色)을 쓰거나, 평상시 예복과 같이 화려한 색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수의를 미리 장만해두면 장수한다는 속설(俗說)이 있어서 회갑이 가까워지면 윤달을 택하여 수의를 준비하거나, 장수하는 노인을 모셔다가 바느질을 부탁하기도 하여 준비하였습니다.

음택풍수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은 집을 지을 자리나 산소 자리를 잡을 때 풍수지리를 활용하였습니다. 그중에서도 중국에서 전래된 『금낭경(錦囊經)』을‘장경(葬經)’·‘장서(葬書)’라고 부른 것처럼, 명당에 조상의 산소를 쓰면 조상이 산천의 좋은 땅의 기운을 받아서 자손들도 복(福)을 받게 된다는 음택풍수를 중시하였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유교적 이념에 따라 풍수의 폐단을 비판하기도 하였지만, 좋은 묫자리를 찾아 조상의 묘를 여러 번 옮기거나 장례를 연기하더라도 조상 숭배라는 좋은 뜻으로 풍수를 중요하게 여겼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음택풍수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석(誌石), 명기(明器)

지석은 죽은 사람의 인적사항이나 무덤의 위치를 기록한 것으로 무덤 주변에 묻는 표지였습니다. 돌 ․ 자기 ․ 토기 등 그 시대에 많이 사용하는 재료로 만들었으며, 형태와 크기도 방형 ․ 원형 ․ 사발 등 다양하였습니다. 지석은 삼국시대부터 사용하였는데, 돌로 만들었으므로 지석이라고 하였고, 훗날 봉분이 무너져서 묫자리를 잃게 되었을 때를 대비한 것입니다. 조선시대는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이름을 쓴 뚜껑과 인적사항을 쓴 바탕석 등 2개의 판석으로 지석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지석 제작에 어려움이 있어서 도자나 흙으로 굽기도 하고, 먹으로 사발에 써서 석함이나 나무 궤(櫃)에 넣어 묻기도 하였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지석에 기록하는 내용도 묻힌 이의 벼슬과 이름만을 쓰는 등 점차 단순화되었습니다.
‘명기’는 무덤 안에 죽은 사람과 함께 매장하는 부장품을 말합니다. 이것은 죽은 자를 위해 살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묻은 것입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죽은 자와 함께 있지 못함을 슬퍼하며 그가 또 다른 세상에서 편하고 즐겁게 살 수 있도록 시종, 말, 생활용품 등을 함께 묻었습니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서 명기는 살아생전의 모습과 같이 만들되, 나무나 흙으로 작게 만든다고 하였는데요. 전시된 유물은 나무 ․ 자기 등으로 만든 인형 ․ 동물인형 ․ 생활용구 등으로 원주변씨 원천군 변수(邊脩, 1447~1524)묘 출토품입니다.

삼년상

삼년상은 부모가 돌아가신 날부터 3년 동안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은혜에 효도를 다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지냈습니다. 장사를 마친 후에 상청 영좌(靈坐)에 부모의 신주를 모시고, 여막(廬幕)에 거처하며, 아침 저녁으로 식사를 올리면서 마치 부모님이 살아계신 듯이 섬겼습니다. 상주가 짚고 있는 대나무 지팡이는 아버지 상(喪)을, 오동나무 지팡이는 어머니 상(喪)을 의미합니다. 상이 끝난 후에도 부모의 신주를 모셨으며, 외출 할 때는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 여겨서 넓은 방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녔습니다. 삼년상이 끝난 이후에도 자식은 자신이 죽을 때까지 제사를 지냄으로써 부모에게 못 다한 효를 다하였습니다.

사당(祠堂), 감모여재도(感慕如在圖)

조선시대는 유교적인 제례에 따라서 집 안에 사당을 짓고, 고조부모, 증조부모, 조부모, 부모 등 4대 조상의 신주를 모셨습니다. 4대 조상은 돌아가신 날에 안채 대청에서 설·추석 등 명절에 사당이나 묘소에서 제사를 통해 후손들과 감응하였고, 반면에 5대 이상의 조상에게는 한식이나 10월에 묘소에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여러 가지 형편상 사당을 두지 못하는 경우에는 벽감을 만들어 조상을 모시거나, 사당을 그린‘감모여재도(感慕如在圖)’를 그려서 지방을 붙이고 제사를 지냈습니다.‘사당’이 그려져 있어 이를‘사당도(祠堂圖)’라고도 합니다. 감모여재도는 타지에 출장을 갈 때 사용하거나 휴대가 편리하도록 족자 형태로 만든 것도 있습니다.

감실(龕室)

감실은 사당을 작게 축소해 놓은 것으로 조상의 신주를 모셔놓은 장(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유물은 두칸으로 만든 작은 규모의 장으로, 사당이 없는 집에서 사용하였습니다. 제기 아래에 있는 그림은‘설찬도(設饌圖)’로 제사를 지낼 때 제사 음식을 놓는 위치를 표시한 제사상 차림표 그림입니다.

제기(祭器)

‘제기(祭器)’는 제사에 사용되는 각종 그릇 및 도구를 말하는데요. 일반적으로 나무 ․ 사기 ․ 놋쇠 등의 재질로 만들었습니다. 묘소에서 제를 지낼 때는 이동이 손쉬운 나무 제기를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제기는 조상을 위한 그릇이기 때문에 사당의 제기고(庫)나 특별히 만든 나무 궤(櫃)에 보관하였습니다. 또한 남에게 제기를 빌려주거나 팔지 못하게 하였고, 수명이 다하여 못쓰게 되면 땅에 파묻어 다른 용도로 쓰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안동 권씨 충재 권벌 종가 불천위 제사상

이 제사상은 경상북도 봉화군 안동 권씨 충재 권벌(權橃, 1478~1548)선생 종가의‘불천위제사상(不遷位祭祀床)’을 재현한 것입니다. 앞서 사당을 설명하면서 4대의 신주가 모셔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당에는 5개의 신주가 모셔져 있는데, 이것이 바로‘불천위제사(不遷位祭祀)’입니다. 불천위는 덕망이 높고 국가에 큰 공로가 있는 인물을 영원히 사당에 모시도록 국가나 유림에서 허가한 신위로, 4대를 넘긴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사당에 영구히 모시면서 지내는 제사를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천위 제사는 그 집안의 후손과 가문의 영광이자 집안의 위상을 상징했습니다. 불천위 제사음식은 『예서(禮書)』를 기본으로 하였으나, 집안에 따라서 특색 있게 진설합니다. 충재가문은 일반적인 시루떡이 아닌 12가지 떡을 층별로 쌓아 올린 잔절편을 사용하는 것과, 이 마을의 전통 유과인 오색강정을 사용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제사음식은 집안에 따라 올리는 음식과 모양이 그 지역의 관습과 가문의 전통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정성을 담아서 준비하는 마음은 모두 같습니다.

맺음말

지금까지 제 3관 <한국인의 일생>을 둘러보시면서 조선시대 후기 양반계층을 중심으로 일생의례와 관련된 주요 여정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이 전시를 통해 조선후기 선조들의 삶 속 지혜를 배우고,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기증자의 벽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기증자의 벽>

이곳은 1964년 첫 기증을 시작으로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총 1,250여명이 51,921점의 자료를 국립민속박물관에 유물을 기증해주신 소중한 분들의 성함과 기증년도, 기증자료 등을 기록한‘기증자의 벽’입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단체, 기관, 심지어 먼 이국땅의 재외국민 혹은 외국인들까지 각지에서 기증해주신 분들의 성함이 적혀 있습니다. 이러한 기증자분들을 통하여 우리 박물관이 생활문화를 연구하고 전시하는 국내 최대 규모의 대표 생활사 박물관으로서 자리매김하는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앞으로도 이러한 소장품이 훗날 당시의 생활문화를 상세하게 복원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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