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설전시관3 한국인의 일생
상례, 제례, 기증자의 벽
앞서 조선시대의 과거제도부터 환갑까지 살펴보았습니다. 지금부터는 조선시대 사람들의 죽음부터 그 이후의 모습까지 즉, 상례와 제례에 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상례
상례는 죽은 사람을 땅에 묻고 27개월 만에 탈상(脫喪)하는 3년 동안의 의례를 말합니다. 조선시대는 ‘효(孝)’라는 유교적인 윤리에 따라 삼년상을 자식의 도리로 여겼습니다. 자식들은 돌아가신 이의 마지막 길을 화려한 상여에 태워 보내고, 내세를 위한 생활 용기인 명기들도 함께 묻었습니다. 그리고 삼년상 동안 자식은 벼슬이나 농사일도 그만두고 집 안에 상청(喪廳)을 차리거나 산소 곁에 여막(廬幕)을 짓고 돌아가신 이가 살아계신 듯이 아침·저녁으로 공양하였습니다.
상여(喪輿), 만장(輓章)
화려한 나무인형으로 장식된 상여가 보이시죠? 이 상여는 전주 최씨 고령 댁에서 사용한 것으로, 진주화단 친목회에서 기증해 주신 것입니다. 현재는 국가민속문화재 제230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상여는 상례 때 관을 묘지까지 운반하는 기구로 원래는 소나 말, 또는 사람이 끄는 수레[柳車]였으나,『주자가례(朱子家禮)』를 수용하면서 사람이 어깨에 메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상여 형태는 가마와 비슷하나, 몸체 좌우에는 멜채[長杠]가 있어서 형편에 따라 12명 또는 24명까지 멜 수 있습니다. 상여는 대개 마을마다 공동으로 준비해두어서 필요할 때마다 빌려서 사용하였으며, 상여틀을 분해․조립할 수 있도록 만들며, 동네에서 조금 외진 곳에 있는 상여집에 보관하였습니다. 이 상여는 4층 누각 형태를 하고 있고, 각 층마다 나무인형과 십이지신상이 장식되어 있습니다. 전시장 위쪽을 보시면,‘상여행렬’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상여행렬 앞쪽으로는 만장 행렬이 앞서게 되는데요. 만장은 고인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며 지은 글을 비단이나 종이에 적어 깃발처럼 만든 것입니다. 대개 살아생전에 고인과 친분이 있었던 사람들이 써서 바치는 것이기 때문에‘만장행렬’의 규모는 곧 고인의 사회적 명성을 알려주는 척도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수의(壽衣)
수의는 상례 절차 가운데 시신을 목욕시키는 습(襲)을 하고 난 후 입히는 옷입니다. 보통 겉옷은 생전에 입던 혼례복이나 회갑 예복 등 큰 예복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고, 속에 입는 옷은 대부분 새 옷을 마련하여 입힙니다. 수의를 제작할 때에는 생전의 옷 크기보다 조금 크게 하였고, 속에 입는 옷은 염색하지 않은 소색(素色)을 쓰거나, 평상시 예복과 같이 화려한 색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수의를 미리 장만해두면 장수한다는 속설(俗說)이 있어서 회갑이 가까워지면 윤달을 택하여 수의를 준비하거나, 장수하는 노인을 모셔다가 바느질을 부탁하기도 하여 준비하였습니다.
음택풍수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은 집을 지을 자리나 산소 자리를 잡을 때 풍수지리를 활용하였습니다. 그중에서도 중국에서 전래된 『금낭경(錦囊經)』을‘장경(葬經)’·‘장서(葬書)’라고 부른 것처럼, 명당에 조상의 산소를 쓰면 조상이 산천의 좋은 땅의 기운을 받아서 자손들도 복(福)을 받게 된다는 음택풍수를 중시하였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유교적 이념에 따라 풍수의 폐단을 비판하기도 하였지만, 좋은 묫자리를 찾아 조상의 묘를 여러 번 옮기거나 장례를 연기하더라도 조상 숭배라는 좋은 뜻으로 풍수를 중요하게 여겼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음택풍수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석(誌石), 명기(明器)
지석은 죽은 사람의 인적사항이나 무덤의 위치를 기록한 것으로 무덤 주변에 묻는 표지였습니다. 돌 ․ 자기 ․ 토기 등 그 시대에 많이 사용하는 재료로 만들었으며, 형태와 크기도 방형 ․ 원형 ․ 사발 등 다양하였습니다. 지석은 삼국시대부터 사용하였는데, 돌로 만들었으므로 지석이라고 하였고, 훗날 봉분이 무너져서 묫자리를 잃게 되었을 때를 대비한 것입니다. 조선시대는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이름을 쓴 뚜껑과 인적사항을 쓴 바탕석 등 2개의 판석으로 지석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지석 제작에 어려움이 있어서 도자나 흙으로 굽기도 하고, 먹으로 사발에 써서 석함이나 나무 궤(櫃)에 넣어 묻기도 하였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지석에 기록하는 내용도 묻힌 이의 벼슬과 이름만을 쓰는 등 점차 단순화되었습니다.
‘명기’는 무덤 안에 죽은 사람과 함께 매장하는 부장품을 말합니다. 이것은 죽은 자를 위해 살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묻은 것입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죽은 자와 함께 있지 못함을 슬퍼하며 그가 또 다른 세상에서 편하고 즐겁게 살 수 있도록 시종, 말, 생활용품 등을 함께 묻었습니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서 명기는 살아생전의 모습과 같이 만들되, 나무나 흙으로 작게 만든다고 하였는데요. 전시된 유물은 나무 ․ 자기 등으로 만든 인형 ․ 동물인형 ․ 생활용구 등으로 원주변씨 원천군 변수(邊脩, 1447~1524)묘 출토품입니다.
삼년상
삼년상은 부모가 돌아가신 날부터 3년 동안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은혜에 효도를 다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지냈습니다. 장사를 마친 후에 상청 영좌(靈坐)에 부모의 신주를 모시고, 여막(廬幕)에 거처하며, 아침 저녁으로 식사를 올리면서 마치 부모님이 살아계신 듯이 섬겼습니다. 상주가 짚고 있는 대나무 지팡이는 아버지 상(喪)을, 오동나무 지팡이는 어머니 상(喪)을 의미합니다. 상이 끝난 후에도 부모의 신주를 모셨으며, 외출 할 때는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 여겨서 넓은 방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녔습니다. 삼년상이 끝난 이후에도 자식은 자신이 죽을 때까지 제사를 지냄으로써 부모에게 못 다한 효를 다하였습니다.
사당(祠堂), 감모여재도(感慕如在圖)
조선시대는 유교적인 제례에 따라서 집 안에 사당을 짓고, 고조부모, 증조부모, 조부모, 부모 등 4대 조상의 신주를 모셨습니다. 4대 조상은 돌아가신 날에 안채 대청에서 설·추석 등 명절에 사당이나 묘소에서 제사를 통해 후손들과 감응하였고, 반면에 5대 이상의 조상에게는 한식이나 10월에 묘소에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여러 가지 형편상 사당을 두지 못하는 경우에는 벽감을 만들어 조상을 모시거나, 사당을 그린‘감모여재도(感慕如在圖)’를 그려서 지방을 붙이고 제사를 지냈습니다.‘사당’이 그려져 있어 이를‘사당도(祠堂圖)’라고도 합니다. 감모여재도는 타지에 출장을 갈 때 사용하거나 휴대가 편리하도록 족자 형태로 만든 것도 있습니다.
감실(龕室)
감실은 사당을 작게 축소해 놓은 것으로 조상의 신주를 모셔놓은 장(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유물은 두칸으로 만든 작은 규모의 장으로, 사당이 없는 집에서 사용하였습니다. 제기 아래에 있는 그림은‘설찬도(設饌圖)’로 제사를 지낼 때 제사 음식을 놓는 위치를 표시한 제사상 차림표 그림입니다.
제기(祭器)
‘제기(祭器)’는 제사에 사용되는 각종 그릇 및 도구를 말하는데요. 일반적으로 나무 ․ 사기 ․ 놋쇠 등의 재질로 만들었습니다. 묘소에서 제를 지낼 때는 이동이 손쉬운 나무 제기를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제기는 조상을 위한 그릇이기 때문에 사당의 제기고(庫)나 특별히 만든 나무 궤(櫃)에 보관하였습니다. 또한 남에게 제기를 빌려주거나 팔지 못하게 하였고, 수명이 다하여 못쓰게 되면 땅에 파묻어 다른 용도로 쓰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안동 권씨 충재 권벌 종가 불천위 제사상
이 제사상은 경상북도 봉화군 안동 권씨 충재 권벌(權橃, 1478~1548)선생 종가의‘불천위제사상(不遷位祭祀床)’을 재현한 것입니다. 앞서 사당을 설명하면서 4대의 신주가 모셔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당에는 5개의 신주가 모셔져 있는데, 이것이 바로‘불천위제사(不遷位祭祀)’입니다. 불천위는 덕망이 높고 국가에 큰 공로가 있는 인물을 영원히 사당에 모시도록 국가나 유림에서 허가한 신위로, 4대를 넘긴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사당에 영구히 모시면서 지내는 제사를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천위 제사는 그 집안의 후손과 가문의 영광이자 집안의 위상을 상징했습니다. 불천위 제사음식은 『예서(禮書)』를 기본으로 하였으나, 집안에 따라서 특색 있게 진설합니다. 충재가문은 일반적인 시루떡이 아닌 12가지 떡을 층별로 쌓아 올린 잔절편을 사용하는 것과, 이 마을의 전통 유과인 오색강정을 사용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제사음식은 집안에 따라 올리는 음식과 모양이 그 지역의 관습과 가문의 전통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정성을 담아서 준비하는 마음은 모두 같습니다.
맺음말
지금까지 제 3관 <한국인의 일생>을 둘러보시면서 조선시대 후기 양반계층을 중심으로 일생의례와 관련된 주요 여정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이 전시를 통해 조선후기 선조들의 삶 속 지혜를 배우고,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기증자의 벽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기증자의 벽>
이곳은 1964년 첫 기증을 시작으로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총 1,250여명이 51,921점의 자료를 국립민속박물관에 유물을 기증해주신 소중한 분들의 성함과 기증년도, 기증자료 등을 기록한‘기증자의 벽’입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단체, 기관, 심지어 먼 이국땅의 재외국민 혹은 외국인들까지 각지에서 기증해주신 분들의 성함이 적혀 있습니다. 이러한 기증자분들을 통하여 우리 박물관이 생활문화를 연구하고 전시하는 국내 최대 규모의 대표 생활사 박물관으로서 자리매김하는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앞으로도 이러한 소장품이 훗날 당시의 생활문화를 상세하게 복원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Permanent Exhibition 3 Korean Life Passages
Funeral Rites · Ancestral Rites · Wall of Donors
Now, we move on to the end of the life of the nobility. In this part, we will see various artifacts that were used for funeral and ancestral rites.
Funeral Rites
In the Joseon Dynasty, people held funeral rites for twenty-seven months. According to the principles of Confucianism, filial piety was considered the most primary duty of children. During a funeral ceremony, a corpse was put in a funeral bier and buried underground with grave goods. The chief mourner among the offspring, usually the eldest son, had to observe a three-year mourning period, during which he stopped working and mourned his deceased parent while living in a shabby hut near their grave.
Funeral Biers and Funeral Elegies
Here, we see a splendid bier decorated with a bunch of wooden miniatures. This bier, donated by the Jeonju Choi clan, was designated as Important Folklore Material No. 230. A bier functioned as a carriage and was used to transport a coffin to a burial point. Originally, a bier was a cart carried by oxen, horses, or humans, but as the guide Family Rituals of Zhu Xi was adopted in Joseon, its design came to be similar to a palanquin that people carried on their shoulders.
A bier had long poles on both sides that could be shouldered by 12 or 24 people. It was designed to be disassembled and stored in a warehouse when not in use. The displayed one is a four-tiered bier and each tier was decorated with wooden miniatures and wooden statues of the 12 Chinese zodiac.
Shall we look up at the upper part of this showcase? We can see a video of bier marching. In this video, there are people holding banners where the elegies for the deceased are written. The funeral elegies leading a funeral procession were called manjang. Because manjang were written by the acquaintances and relatives of the deceased, it was regarded as a measure of their social reputation.
Shrouds
Shrouds were the clothes of the deceased. After washing the corpse, people put shrouds on it. In many cases, one’s wedding dress or their sixtieth birthday clothes were used as shrouds over the innerwear family members newly bought for the deceased. When making a new shroud, people made it bigger than the clothes that the deceased used to wear during their lives. The innerwear was made of undyed fabrics or sometimes vividly colored ones, like other normal clothes. There was a belief that people could live a long life if they prepared shrouds in advance. So, people started to prepare shrouds for their parents when their parents approached the age of 60. In many cases, the shrouds were made during the leap month, as this was believed to ward off bad luck. Sometimes, they asked elderly women to sew the shrouds.
Determining Gravesites
From old times, Korean people referred to Feng Shui, the Chinese practice of creating harmonious surroundings, when they searched for the sites to build houses or bury corpses. Especially, the gravesite was considered very important, because there was a belief that finding a good burial site would bring lots of fortune and luck. Around the late Joseon Dynasty, some Confucians criticized Feng Shui, but they failed to change that old custom. Even today, Feng Shui influences many Koreans. People still look for ideal gravesites for their ancestors and sometimes even move graves or postpone funerals.
Memorial Stones and Grave Goods
In this showcase, we can see memorial stones and grave goods. A memorial stone was a kind of marker to identify the owner and original location of a grave in case the grave collapsed or became hardly recognizable.
The memorial stone dated back to ancient times. In most cases, it was made of stone, but sometimes porcelain and earthenware were used, too. The shapes and sizes were also diverse, including square-, circle-, and bowl-shaped ones.
During the Joseon Dynasty, according to Family Rituals of Zhu Xi, two stone blocks, a lid and a plate, were made. On the lid, the name of the deceased was written, and other personal information was written on the plate. However, due to the difficulties in handling stones, some people used pottery or earthenware instead, or they wrote information on bowls and buried them in stone boxes or wooden chests. As time passed, the contents of the notes gradually became simplified, writing only names and government posts.
Next to the memorial stones, some grave goods are displayed. Grave goods were objects that were buried with a corpse. People buried goods, such as miniature servants, horses, and household items, in the hope that the deceased could live affluent and comfortable lives in the after-world. According to Kukjo-oryeui (the five rituals of the state), grave goods were made of wood or clay and looked realistic. The displayed ones were excavated from the grave of Byeon Su (1447~1524), a high ranking official during the reign of King Jungjong, from the Wonju Byeon clan.
Three-year Mourning Period
During the Joseon Dynasty, when a parent passed away, the children of the deceased observed a three-year mourning period. During this mourning period, the chief mourner offered meals everyday to the spirits of their parents and greeted them every morning and night as if they were alive. People believed that it was the ultimate way to repay their parents for their love and fulfill their duty as children.
This mourner is holding a bamboo cane. Different canes were held depending on the deceased. When a father passed away, his mourners held bamboo canes, and when a mother passed away, they held canes made of wood from a paulownia tree. When mourners went out, they wore banggat, a conical bamboo hat, to cover their faces. It was because they regarded themselves as sinners who didn’t serve their parents well and who, thereby, didn’t deserve to look at the sky. After the three-year mourning period finished, children regularly held ancestral rites for their parents for the rest of their lives to repay their parental love.
Shrines
During the Joseon Dynasty, people built ancestral shrines in their yards and preserved the memorial tablets of four generations of ancestors: their great-great grandparents, their great grandparents, their grandparents, and their parents. The ancestral rites for these four generations of ancestors were held at a wooden floored hall on their death anniversaries, and in shrines or at graves on holidays, such as Seollal (Korean New Year’s Day) and Chuseok (Korean Thanksgiving day). Meanwhile, the rites for the ancestors of five generations and higher were held at their graves on Hansik (around 5 April), the 105th day after the winter solstice, or on someday in October.
Some families who couldn’t afford to build shrines made alcoves in their houses and preserved memorial tablets there. Others used this painting of a shrine called a Sadang-do or a Gammoyeojae-do, which meant that if you sincerely missed and adored something, you would feel as it were actually in front of you. They put a paper memorial tablet, a jibang, on this painting and held ancestral rites in front of it. This painting was produced in the form of a scroll for people to carry when they went on business trips.
Alcoves
An alcove was a miniature shrine where people preserved the memorial tablets of their ancestors. The displayed one was a three-room alcove that was used by a family who did not have a shrine. This painting, called a Seolchan-do, meant a painting of a table setting for ancestral rites.
Ritual Vessels
These vessels were used for ancestral rites. Generally, the ritual vessels were made of wood, pottery, or brass. When people held rites at gravesites, they used wooden vessels for better portability. Because the ritual vessels were offered to ancestors, they were kept in a specially crafted chest. It was strictly forbidden to lend or sell them to others. If they became too worn to use, people buried them underground. They never used them for other uses.
Rites for the Ancestors in Immutable Positions
This table setting is a reenactment of the ritual table for Kwon Beol (1478~1548), a respected government official of the Joseon Dynasty. As mentioned before, a shrine kept four sets of memorial tablets, but there were some families who preserved one more memorial tablet in their family shrines. This tablet was a bulcheonui. The bulcheonui was a memorial tablet for those who made a great contribution to the country and thereby upheld the honor of their family. The bulcheonui rites represented the reputation and power of the family. Once designated as a bulcheonui, his tablet would be immutably preserved in his family shrine and his descendants would hold ancestral rites for him for generations.
The food for this rite was based on the Confucian Classic Yeseo (禮書). This Kwon Beol family offered a 12-tiered rice cake tower, instead of the steamed white rice cake that was commonly seen. They also set out five-colored yugwa, the traditional snack of their village. The table setting could differ according to the family tradition and local customs, but the devotion and respect toward ancestors was the same.
Closing
This concludes the third exhibition Korean Life Passages. This exhibition presented the life of the nobility in the late Joseon Dynasty. Through this exhibition, I hope you could learn about and understand the wisdom of our ancestors.
The last section is the wall of donors. Let me guide you through it.
Wall of Donors
On this wall, the names of donors and their donation years are inscribed. Since 1964, about 1,250 people have donated 51,921 folklore pieces to the National Folk Museum of Korea. Not only individuals, but also many organizations, institutions, and even overseas Koreans or foreigners in remote countries are listed. Thanks to these donors, the National Folk Museum of Korea has grown into a representative life history museum. We hope that this folklore collection continues to play a significant role in preserving and restoring the life culture of traditional Korean society.
Translator: Hyeongmin KO
Copy Editor: Jocelyn WRIGHT
Changhyun OH
第三展厅 韩国人的一生
丧礼, 祭礼, 捐赠者纪念墙
之前,我们了解了朝鲜时代的科举考试直至花甲寿宴。从现在开始了解一下朝鲜时代人们从死亡到之后进行丧礼和祭礼的历程。
丧礼
丧礼指的是安葬死者后二十七个月才能脱丧的仪礼,称为三年丧。朝鲜时代根据儒教伦理的孝道,三年丧被认为是为人子女必须遵守的礼法。子女用豪华的丧與送逝者走完人生最后的旅程,同时也为其来世随葬生活用具(明器)。三年丧期间子女要放弃官职或放下农事,在丧厅或者墓地旁搭起草庐,像父母还活在世上一样,每天晨昏都必到灵前焚香祭拜,以示供养。
丧舆, 挽幛
看到这架富丽堂皇的丧舆了吧?这架丧舆是全州崔氏高灵宅晋州华丹亲睦会捐赠的丧舆,现被指定为国家民俗文化财第230号。丧舆是丧礼时将棺柩运往墓地的工具,原本是牛、马或者人力拖拉的柳车,后依照《朱子家礼》变为人力肩抬的形式。丧舆的形态类似于轿子,舆身左右两边各有一根长杆,每一边由十二个人甚至二十四个人来抬动。丧舆一般每个村庄共同置备,按需租用,而且这类舆架是可以折卸和组装的,保管在离村子一段距离远的丧舆屋里。这架丧舆为四层楼阁式形制,每层上装饰有木刻人偶和十二支神像。请看展场的上方,可以欣赏到 “丧舆仪仗”视频。如影像所示,丧舆队伍的最前面打着挽幛。挽幛类似一杆旗子,绸布或者纸张上写有哀悼的文字。通常是由死者生前好友写后献上的悼文,所以挽幛队伍的规模也成为判断死者社会知名度的一个依据。
寿衣
寿衣是丧礼中洗净尸体后给死者换上的衣服,这个过程称为“袭”。朝鲜时代寿衣外套多用逝者生前穿过的礼服,或者花甲时穿的礼服,里面的则大部分置办新衣。制作寿衣时通常做得比生前大一点,穿在里面的衣服用没有染色的素色,或者用和逝者生前平时穿过的礼服一样的亮色。俗信认为生前备好寿衣会长寿,因此往往在临近花甲时,选择闰月事先准备,或者拜托村里长寿的老人缝制寿衣。
阴宅风水
很久以来,我们的祖先就开始在建阳宅和修阴宅的时候察看风水地理。其中从中国传来的《锦囊经》被称为“葬经”,或“葬书”,很重视阴宅风水,认为如果在明堂修建祖先的墓地,祖上能得到山川吉利的地气,福泽子孙。虽然朝鲜后期根据儒教理念对风水的弊端加以批判,但当时人们为了寻找好的墓地位置,还是不惜三番五次移葬祖坟,或是为了风水拖延葬礼,这也被视为一种崇拜祖先的诚意。到现在还有许多人看重阴宅风水。
志石、明器
志石是记录死者的生平事迹和墓地位置的标志,埋在墓地周边。传统上常用石头、瓷器和陶器等材料制成,形态或方或圆,或呈碗形,且大小不一。志石自韩国三国时代起就开始使用,用石头作成所以称为“志石”,主要是为防止日后因坟墓垮塌而找不到墓地。朝鲜时代根据《朱子家礼》,志石用两块石板做成,一块记名字的盖石,一块记生平事迹的底石。但是,由于志石制作困难,因此也有用陶瓷或者泥土烧制而成的,还有用墨题写在食用的碗具上,放到石函或者木柜里面埋起来的。随着时间的推移,志石上记录的内容也简化了,只写葬者的官位和姓名。
明器,指的是在死者墓中随葬的器物,一般是如其生前一样生活上所需的物品。在世的人因无法和死者在一起而感到悲伤,为了让死者在另一个世界过得舒服快乐,于是把伎乐俑和侍者俑,以及生活用品模型等一起陪葬入土。根据《国朝五礼仪》,明器是仿照逝者生时用器,用木头或者泥土缩微制成。这里展示的文物是原州边氏原川君边脩(1447~1524)墓地出土的陪葬品,有木头和陶瓷制作的人俑、动物俑和生活用品仿制品等。
三年丧
三年丧指的是从自己的父母去世之日起服丧三年,以感念父母生养之恩,竭尽孝道。葬礼结束后设灵座(即灵位)供奉父母的神主(即灵牌,牌位),并入住草庐,早晚献上膳食,奉其如生。丧主拄的拐杖如果是竹制的,意味着是父亲去世,如果是梧桐木,则表示是母亲去世。丧礼结束后,也需供奉父母的牌位,外出时要戴上宽檐斗笠,好似见不得天日的罪人一样。三年丧结束以后,子女还要终生举行祭祀以尽未竟之孝。
祠堂、感慕如在图
朝鲜时代根据儒教祭礼在家中设祠堂,供奉高祖父母、曾祖父母、祖父母和父母等四代祖的灵位。每年四代祖忌日时后孙们在里屋厅堂举行祭祀活动;春节、中秋节等节日时则到祠堂或者墓地进行祭拜,以此先祖与后代交互感应。至于五代以上的祖先,则是在寒食或者10月到墓地奠祭。没条件设立祠堂的家庭则做壁龛供奉祖先灵位,或在绘有祠堂的“感慕如在图”上贴纸榜(即纸质牌位)进行祭祀。因为画着祠堂所以又称“祠堂图”。感慕如在图一般是赴外地任职时使用,为了便于携带,做成挂轴形制。
龛室
龛室是一个微缩的祠堂,形式为用来供奉祖先灵位的柜子。这件文物是一个两间大小的小型龛柜,曾用于家里没有祠堂的人家。祭器下面的图画是“设馔图”,上面标示着祭祀时供桌上摆放祭品的位置。
祭器
祭祀时使用的各种盛器和用具统称祭器。祭器一般用木头、陶瓷和黄铜制成,墓地上多用轻便,易于搬运的木制祭器。因为是用于供奉祖先的器物,所以保管在祠堂祭器库里,或者专门制作木柜存放。另外,祭器不能外借或者卖给别人,若废弃不再使用了的要挖块地埋了,不可以挪作他用。
安东权氏冲斋权橃宗家不迁位供桌
这里陈列的是庆尙北道奉化郡安东权氏冲斋权橃(1478~1548)先生宗家的“不迁位供桌”。之前我们介绍祠堂时讲过,祠堂一般都是供奉四代祖先灵位的地方。但有的祠堂也会看到供奉有5代祖先灵位的情况,这就叫“不迁位祭祀”。不迁位是指对于为国家作出过重大贡献且德高望重的人,得到国家和儒学界的认可后,把他的牌位永远放在祠堂里进行祭祀,而不是过四代后迁埋入坟墓。因此不迁位祭祀是至高无上的荣耀,足以令子孙后代引以为傲。不迁位祭祀的供品基本依循《礼书》的要求,各宗家又有各自的特点。冲斋家门的特点是一般不用糯米甑糕,而是把12种年糕按类别分层重重叠叠地垒起做成切糕样子,还会摆上该村的传统油果五色江米块。虽然根据地方习俗和家风的不同,每家祭祀的供品和形制都各不相同,但慎终追远的诚意都是一样的。
结语
到此为止,我们一起观览了第三展厅《韩国人的一生》,从中了解到以朝鲜时代后期两班阶层为中心的人生仪礼的主要历程以及相关风俗。希望通过这次参观,我们能够领悟到朝鲜后期先祖们生活中的智慧。
最后我们去了解一下捐赠者纪念墙。
捐赠者纪念墙
这面墙上记载着从1964年开始到现在,50余年里1250余名捐赠者的名字,以及51921件捐赠品名录、捐赠年度和相关捐赠资料等内容,称为捐赠者纪念墙。这些捐赠者名单中有个人,有团体,有机构,甚至还有海外侨胞和外国人,得益于他们的捐赠,我馆才能成为目前国内最大规模,最全面展现民众生活史的博物馆。我们希望这里的藏品能够为日后更好地复原当时社会生活的文化发挥更大的作用。
常設展示室3 韓国人の一生
<喪礼・祭礼・寄贈者の壁>
前回、朝鮮時代における科挙から還暦までの内容をご覧いただきました。ここからは、朝鮮時代の人々の死とその後、つまり、喪礼と祭礼についてご紹介します。
喪礼
喪礼は、亡くなった人を埋葬してから、27ヵ月後の除喪までの足掛け3年間の儀礼をいいます。朝鮮時代には、「孝」という儒教的倫理に従い、三年の喪が子の果たすべき道理だと考えられました。子孫たちは、故人の最後の道を華やかな喪輿(サンヨ)に載せて送り、来世で使う生活容器として明器を共に埋葬しました。そして、三年の喪の間、子たちは官職や農業を休み、家に喪庁を設けたり、お墓の隣に廬幕(ヨマク:喪屋)を立てて、故人の生前と同様に、朝晩の食事を供えました。
喪輿(サンヨ)・輓章(マンジャン)
たくさんの木製人形で飾られた華やかな喪輿(サンヨ)が見えますね。これは、全州(チョンジュ)崔(チェ)氏の高霊(コリョン)宅で使われた喪輿で、寄贈されたものです。現在、国家民俗文化財第230号に指定されています。喪輿は、喪礼の時に柩をお墓まで運ぶ器具で、元々牛馬や人が引く車でしたが、『朱子家礼』の影響で人が肩に担ぐようになりました。喪輿の形は一般の輿と似ていますが、本体の左右に担ぎ棒があり、状況によって12人から24人まで担ぐことができます。喪輿は、村ごとに共同で所有・使用しましたが、組み立て式になっており、村の少し離れた所に保管されました。こちらの喪輿は4階の楼閣式で、各階に木製の人形と十二支神像が飾られています。
上の方には、喪輿の行列の映像が流れています。ご覧のように、喪輿の行列の先頭には輓章(マンジャン)を立てます。輓章は、故人の死を哀悼して綴った文章を絹や紙に書き記した旗です。普通、故人と生前に親交があった人々が掲げるものなので、輓章の行列の規模は、故人の社会的名声が分かる尺度でもありました。
寿衣(スウィ:死装束)
寿衣(スウィ:死装束)は、喪礼の過程の中で、遺体を洗った後に着せる服のことです。普通、故人が生前着た婚礼着や還暦に着た服など、礼服が使われる場合が大半でしたが、新しい服を用意することもありました。寿衣を作る時は、普段の衣服のサイズより少し大きめにして、生成りの生地を使用しましたが、礼服のように華やかな色が使われることもありました。事前に寿衣を用意して置けば長生きするとの説があり、還暦が近付くと、閏月を選んで寿衣を作っておいたり、長生きしている高齢の人に仕立てを頼むこともありました。
隠宅風水
かつて先祖たちは、家やお墓の場所を選ぶ時に、風水を活用しました。中でも、中国から伝わり「葬経」「葬書」とも呼ばれた『錦囊経』の思想、即ち風水の良い地に先祖のお墓を造ると、先祖が山河の良い気をもらって子孫たちに幸せが訪れるという陰宅風水が重視されました。朝鮮後期には儒教的理念に基づき風水の弊害を批判することもありましたが、良い土地を探して、先祖のお墓を何度も改葬したり葬式を延期するほど、祖先崇拝にあたって風水は重要なことと考えられました。現在も多くの人々が陰宅風水を重視しています。
誌石(チソク)・明器
誌石(チソク)は、故人の情報・経歴やお墓の位置などを記録したもので、お墓の傍らに埋めた標識です。石・磁器・土器など、その時代に多く使われた材料で作られ、形や大きさも、方形・円形・鉢など様々でした。誌石は、後日盛り土が崩れてお墓が失われることに備えたもので、三国時代(高句麗・百済・新羅、BC1世紀頃~AD7世紀頃)から出現するようになり、石で作られたため誌石と呼ばれました。朝鮮時代には『朱子家礼』に基づき、名前が記された蓋と経歴などが記された石の二枚の板石で誌石が作られました。しかし、石材は加工が難しいため、焼き物が用いられたり、鉢に墨汁で記して石箱や木箱に納めて埋めることもありました。時間の経つにつれ、誌石に故人の官職と名前のみ記すようになり、その内容が簡素化されました。
明器は、故人と共にお墓に納める副葬品のことです。故人が死後にも生前と同様の生活をするのに必要なものを埋めました。生きている人たちが故人と一緒にいられないことを悲しみ、また、故人が死後の世界でも安らかで楽しく過ごせるようにとの思いを込めて、従者・馬・生活用品などを木や土で作って埋葬しました。『国朝五礼儀(朝鮮における五つの国家儀礼の規範をまとめた礼法書)』に、明器は生存時と同様のものを作るが、木や土で小さく作ると定められています。こちらの展示品は木製・磁器製の人形・動物・生活用品で、原州(ウォンジュ)辺(ピョン)氏の辺脩(ピョン・ス、1447-1524)の墓からの出土品です。
三年の喪
三年の喪は、親が亡くなってから足掛け3年に渡り、産み育ててくれた親に対する恩返しや孝行の意味で服すものです。葬儀が終わった後、喪庁の霊座に亡くなった親の位牌を祀り、廬幕(ヨマク:喪屋)に起居して朝晩の食事を供えながら、親が生きているかのように丁重に仕えました。喪主は喪杖を突きますが、父親の喪には竹の杖、母親の喪には桐の杖を突きました。服喪中に出掛ける際には、天を見上げることのできない罪人として、パンガッ(方笠)を被って顔を隠しました。除喪の後にも親の位牌を祀り、自分が死ぬまで親の祭祀を執り行うことで、生前の親に果たせなかった孝行を尽くそうとしました。
祠堂・感慕如在図(カンモヨジェド)
朝鮮時代には儒教的祭礼に従い、家に祠堂を建てて、高祖父母・曾祖父母・祖父母・父母の四代の位牌を祀りました。四代の祖先の祭祀は、命日にはアンチェ(女性の生活空間)のテチョン(板の間)で、ソル(お正月)・チュソク(秋夕:旧暦8月15日)などの名節(祝日)には祠堂や墓地で行われました。一方、五代以上前の祖先に対しては、寒食(冬至から105日目の名節、4月5日頃)や10月に、墓地で祭祀を行いました。様々な事情で祠堂を持てない場合は、壁龕を設けて祖先を祀ったり、祠堂を描いた「感慕如在図」に紙榜(チバン:紙製の位牌)を貼り付けて祭祀を行いました。この絵は祠堂が描かれていて「祠堂図」とも呼ばれます。感慕如在図は、出張先で祭祀を行う時に用いられることがあり、持ち運びやすくするために掛け軸にしたものもあります。
龕室
龕室は、祠堂を縮小した形で、祖先の位牌を安置する厨子のようなものです。こちらの展示品は二間に区画した小さい龕室で、祠堂を持たない家で使われました。祭器の下に広げられている図は「設饌図」で、祭祀の時の供え物の配置図です。
祭器
祭器は、祭祀に使われる様々な器や道具のことです。一般的に、木材・焼き物・真鍮などの材料で作られました。お墓で祭祀を行う時には、運びやすい木製の祭器が多く使われました。祭器は祖先のための器であるため、祠堂の祭器庫や特別に作った木製の櫃に保管しました。また、祭器を他人に貸したり売ったりしてはならず、使えなくなったら地中に埋めて、他の用途に使われないようにしました。
冲齋・権橃の本家における不遷位祭祀床
こちらの祭祀床(チェササン:お供え膳)は、慶尚北道(キョンサンプクト)奉化郡(ポンファグン)に居住する安東(アンドン)権(クォン)氏の冲齋(チュンジェ)・権橃(クォン・ボル、1478-1548)の本家で行われる「不遷位祭祀床」を再現したものです。前述したように、祠堂には四代の先祖の位牌が祀られましたが、中には五つ目の位牌が祀られることがあります。これが「不遷位祭祀」です。「不遷位」は、徳望が高くて国に尽くした功績がある人に対し、代々祠堂で祀られるよう国や儒林が認めた位牌のことで、四代が過ぎても位牌を土中に埋めず、祠堂に安置して永久に祭祀を執り行いました。それ故に、不遷位祭祀は子孫にとって名誉なことであり、一家の品格を表すものとされました。
不遷位祭祀でお供えする料理は、基本的に礼法書に従いましたが、家ごとにそれぞれの特色を活かして用意しました。冲齋家は一般のシルトック(蒸し餅)ではなく、12種類の餅を積み上げ、この村の伝統菓子である五色カンジョンをお供えするのが特徴です。祭祀料理は、地域のしきたりや家の伝統により、家ごとに少しずつ異なりますが、真心を尽くして準備するのは皆一緒です。
終わりに
ここまで、常設展示室3<韓国人の一生>にて、朝鮮時代後期の両班(ヤンバン)を中心に、通過儀礼にまつわる人生の旅路をご紹介しました。この展示を通し、先祖の生活の知恵を学び理解する時間を過ごしていただけたのであれば幸いです。
最後に、「寄贈者の壁」をご紹介します。
寄贈者の壁
ここは、1964年から現在まで50年以上に渡り、1,250名の寄贈者から51,921点の貴重な寄贈品をいただいたことを記念して、寄贈者のお名前と寄贈年度、寄贈品などを記した「寄贈者の壁」という空間です。個人のみならず、団体・機関から、海外にお住まいの国民または外国人に至るまで、各地から寄贈していただいた方々のお名前が刻まれています。当博物館が生活文化を研究・展示する国内最大規模の代表的な生活史博物館として発展できたのは、寄贈者の方々のご協力に寄るところが大きいと考えています。今後も、寄贈品を含めた当館の収蔵品が、後日、当時の生活文化を復元するのに重要な役割を担うことを期待します。
日本語翻訳 河閔恵(ハ・ミンヘ)
翻訳監修 中村克哉(なかむら かつ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