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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전 시 명: 《대구 섬유, 우리 삶을 바꾸다》
ㅇ 전시 장소: 대구섬유박물관 기획전시실
ㅇ 전시 기간: 2021. 09. 16.(목) ~ 12. 12.(일)
ㅇ 전시 자료: 대구상공시가도', '장미표 털실', '면직기', '낙하산지 블라우스' 등 대구섬유 관련 근현대 자료와 사진, 영상 등 300여 점
ㅇ 전시 내용: 섬유도시 대구를 이끈 면·모·나일론을 살펴보고, 이로 인해 변화한 우리의 삶의 모습 조명
1부. 대구, 섬유를 꽃피우다
1-1. 섬유산업, 대구의 씨앗이 되고
1-2. 대구사람, 꿈의 섬유를 만들고
1-3. 대구섬유, 전국으로 불티나게 팔리고
2부. 대구섬유, 생활을 바꾸다
2-1. 옥양목, 혼수에도 빠지지 않고
2-2. 양복지, 누구나 양복 입은 신사가 되고
2-3. 나일론, 멋쟁이아가씨의 스타킹에서 모기장까지
ㅇ 주최: 국립민속박물관·대구섬유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관장 김종대)은 대구섬유박물관(관장 박미연)과 함께 2021년 9월 16일(목)부터 2021년 12월 12일(일)까지 대구섬유박물관에서《대구섬유, 우리 삶을 바꾸다》 공동기획전을 개최한다.
섬유도시 대구와 대표적인 제품을 통해 변화된 우리 삶을 조명하는 이번 전시는 2부로 구성된다. '1부-대구, 섬유를 꽃피우다' 에서는 대구의 섬유산업과 공장노동자, 섬유를 사고파는 시장 상인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2부-대구섬유, 생활을 바꾸다'에서는 주요 섬유 생산품 가운데 전국적으로 인기 있었던 옥양목, 양복지, 나일론을 소개하고 그로 인해 변한 우리의 일상이 소개된다. 300여 점의 근현대 자료와 사진, 영상을 통해 대구섬유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보자.
대구는 광복 이후 우리나라 산업화·도시화를 이끈 섬유산업의 중심지이다. 일제강점기부터 실을 생산하는 많은 제사공장(製絲工場)이 있었고, 상대적으로 6·25전쟁의 피해도 적어 한반도 최대 직물 산지로 성장하였다.
6·25 전쟁이 끝나고 섬유 소비가 늘어나자, 대구는 섬유공장 기계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1950년대, 대구 비산동에서 부친이 섬유공장을 운영했던 이장백씨는 "대구시민을 먹여 살린 것은 섬유다. 당시에는 비산동에만 50개가 넘는 섬유공장이 있었다."고 기억을 전한다.
1950년대 대구의 섬유공업이 활기를 띠면서 광목, 포플린, 옥양목 등 면직물 생산량이 크게 늘었다. 이중 옥양목(玉洋木, calico)은 표면이 옥처럼 고운 하얀 서양무명으로, 부드럽고 섬세하여 전국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귀한 면직물로 여겨져 혼숫감으로도 많이 이용되었는데, 전시에서는 시집가는 딸에게 어머니가 직접 지어 보낸 '옥양목 버선과 앞치마', 혼수품으로 준비한 '상복용 치마저고리', 옥양목 '보자기' 등을 선보인다.
광복 이후 서구식 복장이 유행하면서, 마카오·홍콩 등지에서 밀수입한 양복지로 옷을 맞춰 입는 '마카오 신사' 가 등장하였다. 1954년, 대구에 제일모직이 설립되고 본격적으로 모사(毛絲)를 생산하며 골덴텍스 양복지를 출하하였다. 품질 좋은 국산 양복지는 서문시장을 통해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마카오 신사를 물리치며 비싼 수입 양복지를 대체하였다. 이후 양복지는 코트, 모자, 장갑, 교복 등 다양한 제품에 활용되어 겨울을 더욱 따듯하고 멋있게 보낼 수 있게 하였다. 이번 전시에서는 국산 모직물의 신호탄을 울린 제일모직의 '장미표 털실'과 상표, '골덴텍스 양복지', '맞춤 양복' 등을 만날 수 있다.
지금은 흔해 빠진 나일론이지만, 국내에 처음 소개된 1950년대에는 멋쟁이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고급 섬유였다. 나일론 적삼 하나 없다고 부부싸움 끝에 비관 자살한 여인이나(1955. 07. 16. 조선일보), 나이론 치마를 안 사준다고 부모를 비난하던 딸이 자살을 기도한 신문 기사(1955. 08. 12. 경향신문)가 전해질 만큼, 당시 나일론에 대한 인기는 실로 대단했다. 수입에 의존하던 고급 소재였던 나일론이 저렴하게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1963년 대구의 한국나이롱(주)에서 본격적으로 나일론을 생산하면서부터이다. 이번 전시는 그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나일론 스타킹', '한복', '낙하산지 블라우스'부터 '모기장', '우산', '칫솔' 등에 이르는 생활용품에까지, 우리의 생활 속에서 다양하게 쓰인 나일론 제품을 재조명한다.
2부의 마지막 부분에 마련된 1950~80년대 주거공간에서는 우리 삶을 편리하게 변화시켜 온 섬유제품들을 만날 수 있다. 섬유는 늘 우리 생활과 함께해왔다. 이번 전시를 통해 다양한 섬유제품을 관람하며 대구섬유와 함께 해온 우리들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생활 속 섬유가 전하는 시대적 유행과 의미를 돌아보길 바란다.
1 | 대구상공시가도 1954년 ∥ 조현제 소장 1954년 대구 중구 공평동, 삼덕동, 동인동, 달성동, 서구 비산동, 원대동, 북구 칠성동, 침산동 일대의 상점과 공장 현황을 알 수 있는 지도이다. 내외방직, 대구메리야스, 삼호방직, 조선방직 대구공장, 금성방직 등의 위치와 내외방직 면직물 '백합표' 상표가 표시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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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옥양목 상표 '미인'과 옥당목 상표 '목단' 1957년 복제품 Replica 대구의 대표적인 면직물 생산 기업인 대한방직의 옥양목(玉洋木) '미인' 과 옥당목(玉唐木) '목단' 상표이다. 옥양목은 표면이 옥처럼 곱고 하얀 서양무명이라는 뜻으로, 1950~60년대 대구 면방직 산업의 주요 생산품 중 하나였다. 저고리, 조끼, 두루마기, 고의, 적삼, 바지 등에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옥당목은 옥양목 가운데 품질이 낮은 것을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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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표 털실과 골덴텍스 양복지 1970년대 제일모직에서 생산한 장미표 털실과 골덴텍스 양복지이다. 1956년 대구공장에서 처음 출시된 장미표 털실은 순모 100%로 보온성과 촉감이 좋아 모사 시장을 독점할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같은 해 출시된 골덴텍스 양복지는 당시 밀수입된 마카오 양복지의 5분의 1 가격이었다. 저렴한 가격과 우수한 품질로 인기를 얻었다. |
4 | 서문시장 라사점 사진 1970년대 ∥ 정남호 소장 각종 원단을 파는 전문 도소매 시장인 서문시장은 1지구에는 주단·포목점이, 4지구에는 양복지를 파는 라사점이 주로 밀집해 있었다. 특히 4지구의 라사점은 양복의 대중화에 기여하고, 전국 양복지 유통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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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나이론 스타킹 1960년대 후반 ∥ 대구섬유박물관 광복 이후 국내에 소개된 나일론은 1950~60년대까지 고가의 고급 원단으로 인식되어 제의나 혼수품 등에 사용되었다. 일상생활에서 인기를 끈 나일론 제품은 단연 실용적인 스타킹, 양말 등이었다. 그 외에도 나일론으로 만든 한복과 블라우스, 드레스 등도 유행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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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일론 한복 1960년대 ∥국립민속박물관·경운박물관 나일론으로 만든 여성용 한복이다. |
7 | 제의 1965년 이전 ∥ 오륜대한국순교자박물관 나일론으로 만든 제의이다. 나일론은 처음 출시되었을 때 고급 직물로 여겨져 천주교 복식인 제의를 만드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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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대한항공 1기 유니폼 1969년 ∥ 대구섬유박물관 복제품 Replica 100% 나일론 소재로 만든 대한항공 1기 객실승무원 유니폼이다. 1960~70년대 양장 문화의 대가로 불린 송옥 양장실에서 제작한 이 유니폼은 당시 파격적 색상인 다홍색을 사용했다. 이후 버스 안내원 복장 등 여러 분야에서 이 유니폼을 모방한 디자인이 만들어지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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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낙하산지 블라우스 1950년대 나일론 소재의 낙하산지 블라우스이다. 6·25전쟁 군수물자인 낙하산지 등에 사용되었던 나일론은 전쟁 이후 여성의 옷감으로 재활용되기도 하였다. 속이 훤히 보이고 비에 젖으면 옷감이 피부에 달라붙기도 하여 남성용 백색 면 소재 속옷을 안에 받쳐 입기도 했으며, 몸에 꼭 맞는 스커트, 굽 높은 구두와 함께 착용하는 것이 유행했다. |